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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bi Desert, Mongolia

문명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과정예술에의 도전  

 

최태만  TeaMan Choi

(KookMin University, Professor / Art Critic)

 

국제사막예술프로젝트의 의미

 

예술품의 제작은 필연적으로 문명의 지배를 받는다. 구석기시대 동굴벽화를 그렸던 크로마뇽인이라면 자연에서 채취한 물질로만 그림을 그렸겠지만 오늘날 미술가들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재료와 공구는 산업생산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를 가공한 안료나 전동공구가 없는 상태에서 작업한다면 원시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일까. 게다가 현대문명의 상징인 화석연료와 전기,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없는 땅에서 작업을 한다면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2006년 조각가 성동훈(成東勳)으로부터 국제사막예술프로젝트에 동참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가 제시한 문명의 도움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작업을 해보자는 제안은 인상적이고 매력적인 것이었다. 전기를 공급해야 작동하는 공구나 화학적 공정을 거쳐 생산된 안료를 거부하고 황량한 자연에서 작업한다는 것은 마치 스톤헨지를 세우던 시대로 되돌아가자는 것처럼 무모하고 가망 없는 시도처럼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인도사막을 여행하고 돌아온 그는 온갖 다양한 물질이 만연하는 오브제 중심의 현대미술, 게다가 주문에 따라 오브제를 제작하거나 작품이 상품으로 시장에서 거래하는 현대미술의 한 양상에 회의를 품고 당시 미국 마이애미대학 교수이자 조각가인 팀 커티스(Tim Curtis)와 의기투합해 국제사막프로젝트를 조직하고 막 실행하던 단계였다. 2006년 미국 네바다사막에서 처음으로 가졌던 이 사막예술프로젝트는 나에게도 강한 유혹으로 다가왔다. 정제된 기름과 전기가 없는 황량한 황무지에서 작업을 한다는 것도 관심을 끌었지만 무엇보다 사막에 대한 낭만적 환상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학기 중이라 네바다사막 프로젝트에는 참여할 수 없었던 아쉬움을 가지고 있던 중에 이번에 두 번째로 조직한 고비사막예술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행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물건으로서의 작품을 항구적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관념과 예술의 상업화에 저항하여 현대미술이 퍼포먼스, 대지예술, 과정예술 등의 영역을 개척한지는 오래된다. 1960년대 후반으로부터 1970년대 초반 미국에서 미술의 상업화에 대한 반동으로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로부터 자극을 받아나 나타난 대지예술은 상업주의에 물든 갤러리와 ‘명작의 무덤’인 미술관 제도를 거부하고 자연을 대상으로 표현의 영역을 확장시키거나 스톤헨지와 같은 원시석기문명을 연상시키는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시도를 한 경향에 붙여진 명칭이다. 브라이언 앨디스(Brian Aldis)란 소설가가 쓴 소설제목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거대한 자연 속에 예술적 개입을 한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이 이러한 경향의 작업에 대해 ‘대지예술(Earth Art)’라고 명명한 이래 한 대지예술은 영구불변의 아름다움을 목표로 한 종래의 미술개념에 저항하였으나 그 속성에 있어서 결과보다 아이디어가 중요하므로 개념미술이 확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과정이 중요하게 취급되기 때문에 과정예술의 특징을 띌 수밖에 없다. 용어의 의미상 랜드아트(Land Art)가 흙, 물, 돌, 산, 초원, 바다 등 대지 자체를 소재로 한 것이라고 한다면 어스아트(Earth Art)는 그 외의 환경적 요소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으므로 환경예술(Environment Art)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zer)나 로버트 스미슨과 같은 대지예술가들이 시도했던 대지예술이 거의 토목공사에 가까운 것이라고 한다면 데니스 오펜하임(Dennis Oppenheim)이나 리처드 롱(Richard Long), 크리스토(Christo) 등은 환경을 크게 변형하지 않는 범위에서 작업하였으며, 특히 나뭇잎이나 얼음 등을 활용한 골드워시(Andy Goldworthy)의 설치작업은 자연을 존중하면서 작업의 결과물을 최종적으로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는 특징이 있다. 열흘에서 보름간 세계 여러 나라의 사막에서 진행하는 국제사막예술프로젝트는 현장에서 채집한 재료만 활용하고 작품을 현장에 놓고 온다는 점에서 대지예술이자 과정예술을 지향하는 프로젝트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의 결과는 대체로 작업의 개념과 과정을 기록한 텍스트, 드로잉, 사진, 영상 등으로 수록된다.

몽골어로 ‘풀이 자라지 않는 땅’을 의미하는 고비사막은 우리에게 어떤 곳으로 각인되고 있을까? 그곳은 황량한 황무지, 황사의 진원지, 또는 유목민의 땅으로만 기억되는 장소일까? 사막을 떠올릴 때 풀이 자라지 않는 황무지와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을 연상하기 쉽다. 몽골의 남쪽 대부분과 중국의 북쪽지역에 펼쳐진 고비사막은 몽골 국토의 41.3퍼센트를 차지하는 광활한 불모지임에 분명하지만 바위산, 계곡, 숲, 초원, 호수, 오아시스, 모래언덕 등을 고루 갖추고 있다. 인구밀도는 희박하지만 풀이 있는 곳에는 유목민의 게르와 함께 양, 염소, 낙타, 말 등의 가축이 있으며, 산양, 늑대, 여우, 담비, 가젤, 까마귀, 독수리 등의 야생동물들도 종종 발견된다. 또한 들쥐, 다람쥐, 토끼, 뱀, 도마뱀, 전갈 등도 사막 여기저기에 서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비사막을 종단하며 매일처럼 본 것은 가없이 펼쳐진 초원에 수시로 발생하는 회오리바람이었다. 풀이 자라고 있으나 황량하기 그지없는 들판, 자갈과 모래로 뒤덮인 불모의 땅인 고비사막에서 진행한 2009국제사막예술프로젝트에는 애초에 창설자의 한 사람인 커티스는 물론 오스트리아 작가가 참가하기로 하였으나 당시 확산되고 있는 신종인플루엔자에 대한 우려와 개인적 사정으로 마지막 순간에 합류를 포기하였다. 결국 고비사막으로 떠난 작가는 성동훈, 다발김, 이명복, 광모와 탈랜트이자 오지탐험가로서 영상촬영을 맡은 박세진, 비평의 필자를 비롯하여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영국작가 프란시스 고밀라(Francis Gomila), 몽골에서 합류한 툭소윤(Togsoyun Sodnom) 총 여덟 명이었다. 이 글은 보름이란 짧은 기간 동안 여덟 명이 고비사막을 종단한 여정과 각자의 작업에 대한 기록으로서 본격적인 비평문이라기보다 보고서이자 기행문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관광객이 아니라 사막에서 작업할 작가들이다.

 

2002년 모란미술관이 기획한 ‘몽골현대미술전-유목민의 서사시’ 전시를 위해 처음으로 몽골을 밟아본 적 있는 내가 2009년 9월 14일 심야에 칭기즈칸공항에 도착했을 때 받은 인상은 7년의 시간이 울란바타르를 바꿔놓았다는 사실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칠십 만명이던 울란바타르의 인구가 백만 명으로 늘었고 공항도 제법 국제공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늦은 밤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서니 제법 찬 공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여행사에서 제공한 밴으로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였으나 한 방에 여덟 명을 수용하는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라 근처의 호텔로 옮겼다. 그러나 말이 호텔이지 시설은 낙후했고 방문의 잠금장치도 허술했다. 문과 창틈사이에 찬 공기가 유입돼 실내가 너무 추웠고 침대도 부실해 당장 프란시스가 먼저 불만어린 표정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이 프로젝트의 감독인 성동훈이 호텔을 옮기자는 프란시스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우리는 관광 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막에서 작업을 하러 여기에 왔다. 앞으로 사막에서 텐트를 치고 자는 날이 많을텐데 이 정도는 양호한 숙소이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소 착 갈앉은 분위기에서 맥주를 나눠 마신 후 샤워는커녕 세수도 하지 않은 채 각자 침대 위에 침낭을 깔고 그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해야만 했다. 침낭을 챙겨가지 못한 나는 성동훈이 빌려준 침낭을 요삼아 깔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코감기가 걸려있었다. 한나절을 훌쩍거리며 콧물을 흘리긴 했으나 첫날밤의 ‘극기훈련’ 덕분인지 사막에 있는 동안 몸살이나 감기 따위는 잊고 지낼 수 있었다. 이튿날 다시 숙소를 예의 그 게스트하우스로 옮겨 객실당 두 명씩 배정하고 하루를 더 묶으며 사막예술프로젝트의 준비상황을 확인했다. 아침식사를 위해 시내를 산책하려니 처음 이 도시를 방문했을 때와는 다른 풍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엄청나게 늘어난 빌딩과 포장도로, 그 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고급승용차도 새로웠지만 시내에서 말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칠 년 전 울란바타르에서 일주일 동안 머무를 때만 하더라도 도로는 포장돼 있지 않고, 유목민이 말을 몰고 유유히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2006년 몽골제국 건국 800년을 맞아 대대적인 도시개발을 추진한 결과 현재 울란바타르 시내는 수많은 자동차들로 뒤섞인 도로를 횡단하기 위해 모험을 해야 할 정도로 부산하고 활력 넘쳤으며 또한 위험했다. 정오쯤 몽골의 대표적인 조각가이자 전 몽골미술가협회 회장이었으며 나와는 막역한 관계인 볼드(Luvsangiin Bold)를 만나 몽골에서 참가할 여성작가 툭소윤을 소개받았다. 그녀는 이미 여러 차례 고비사막을 다녀온 바 있었고 러시아에 7년간 유학한 엘리트로서 영어도 능숙했다. 사막에서 지낸 동안 그녀는 마치 어머니나 누이처럼 자상하게 우리 일행을 돌봐주었다. 우리 일행을 위해 훌륭한 점심식사자리를 마련해준 볼드는 늦은 오후에 자신의 차로 백화점까지 데려갔다. 여기에서 사막에서 필요한 생필품을 구입하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맥주와 보드카를 마시며 사막에서 할 작업에 대해 늦게까지 대화하다보니 자정이 가까웠다. 비자문제로 하루 늦게 출발한 박세진이 자정쯤 몽골에 도착해 합류함으로써 사막으로 떠날 모든 사람이 모이게 되었다.

9월 16일 아침 7시에 기상하여 바게트와 커피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8시 30분경 게스트하우스에서 임대한 텐트, 식기 등을 확인한 후 러시아제 지프와 미니밴에 분승했다. 약간 쌀쌀했지만 기분 좋을 정도로 상쾌한 날씨와 청명한 하늘이 우리의 출발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소 흥분된 상태로 출발했지만 울란바타르 외곽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마지막 장을 보고난 후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열흘간 마실 물과 먹을 쌀, 양고기, 야채 등을 추가로 구입하였기 때문에 화물을 적재할 공간이 부족해 큰 가방은 밴 위에 올리고 모든 짐들로 화물칸을 가득 채운 후 호기롭게 출발했으나 출발과 동시에 성동훈의 가방 하나가 없어진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슈퍼마켓에서 출발한지 채 몇 분도 안 돼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가방을 찾는 소동이 벌어졌으나 밴의 조수석에 놓아두었던 가방의 행방은 묘연했다. 다행히 그 가방에 여행 중 지출할 현금은 들어있지 않았으므로 더 이상의 수색을 포기하고 다시 출발했지만 첫날부터 일어난 도난사건은 우리 일행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상한 것은 가방과 함께 슈퍼마켓에서 구입한 김치가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었다. 덕분에 울란바타르를 떠난 이후 김치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사막에 흩어진 동물의 뼈를 수습하여 작업하다.

 

가방도난사건으로 어수선하게 출발했지만 울란바타르를 벗어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산에 있는 ‘오보’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사막에의 기대가 되살아났다. 오보란 우리나라의 성황당과 비슷한 것으로서 몽골의 무속이 여전히 몽골사람들의 심층무의식은 물론 일상 속에 깊이 침윤돼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돌무더기 위에 기둥을 세우고 다섯 색깔의 헝겊을 묶어놓은 이 오보를 세 바퀴 돈 후 다시 출발하여 산을 넘자마자 드디어 초원이 펼쳐졌다. 얼마나 달렸을까. 광활한 초원에는 먼지를 풀풀 날리며 달리고 있는 우리 일행의 차밖에 없었다. 비슷한 풍경이 펼쳐졌기 때문에 심심하다싶을 정도면 간혹 멀리서 하얗게 일어나는 먼저를 통해 다른 차가 달리고 있음을 확인할 정도였다. 남쪽으로 다섯 시간 가량 내려가 초원의 언덕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네 시간가량을 더 달려 해가 질 무렵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바가가자린 출루(Baga garzryn chuluu)에 도착하였다. 초원으로 둘러싸인 이 바위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해발 1,768미터에 이르며 옛날부터 원주민들에게 성스러운 산으로 숭배되었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바위벽 뒤에 작은 사찰의 폐허가 남아있었다. 몽골은 15세기 티베트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1924년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 국교로 채택할 만큼 불교의 영향력이 컸으므로 비록 폐허라고 할지라도 고비사막 여기저기서 사원의 흔적이 남아있다. 바위로 둘러싸인 평지에 서둘러 텐트를 설치하고 땔감을 수집하러 다니는데 왠 남자가 나타나 국립공원이니 사용료를 내라고 했다. 행색은 남루했지만 군복과 같은 유니폼을 입고 허리춤에 가스총까지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산지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느닷없는 출몰로 다소 의아하긴 했으나 협상 끝에 국립공원 입장료를 지불하니 그가 영수증을 발행해주고 땔감을 모아놓은 곳까지 안내를 해주었다. 모닥불을 피웠으나 밤이 깊어지자 추위가 심해졌다. 첫 야영의 흥분과 긴장 속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한기로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당장 생리현상의 해결이 문제였다. 게다가 세수할 물도 없었으므로 물티슈로 대충 얼굴을 닦아야만 했다. 야영지에서 가까운 바위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니 주변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웠고, 소들이 야영지 주변에서 유유히 풀을 뜯고 있었다. 초원으로 들어선 후 지금까지 보지 못한 숲과 바위계곡을 넘어서니 폐사지가 나타났다. 오전은 주변풍경을 촬영하거나 드로잉을 하고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나는 실로 이십 여년 만에 솟아오른 기암괴석과 그것을 둘러싼 풍경을 스케치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고비 중부에 있는 만달고비란 작은 도시로 가는 길은 초원이라기보다 황토벌판에 가까웠다. 도로도 없고 땅 위에 남아있는 바퀴자국을 따라 가다보니 두 차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란히 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탄 지프를 운전하는 ‘소무야’란 이름의 60대 기사는 전직 장교출신으로 전역 후 차를 구입, 12년째 고비를 찾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했다. 풍부한 경험과 노련한 운전실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행 중 두 번 정도 길을 잃을 만큼 고비로 가는 길은 직관과 경험에 의존해야 했다. 광활한 초원을 두 대의 차가 나란히 달리다보니 멀리서 달리고 있는 미니밴이 일으키는 먼지를 통해 그 차의 위치와 거리를 파악할 수 있었지만 지평선을 향해 달리는 차먼지가 마치 키리코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몽환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렇게 또 한나절을 달려 울란바타르에서는 260킬로미터, 바가가자린 출루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만달고비에 도착해 지프의 구동장치를 수리하는 동안 은행에서 환전을 하고 소읍 정도 규모인 도시를 구경했다. 지프의 바퀴를 고친 후 다시 출발해 이른바 흰색 탑으로 불리는 차간수베르가(Tsagaan suverga)가 지척에 보이는 사막지역에 자리를 잡고 야영했다. 바람은 세찼지만 다행히 날씨가 그렇게 춥지 않았기 때문에 대형 그늘막을 치고 그 아래에서 보드카를 나눠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자니 총총히 빛나는 별이 우리 일행의 대화에 끼어들기라도 하듯 가까이 있었다. 이튿날 차간수베르가 지역을 둘러보고 촬영과 간단한 드로잉을 한 후 근처의 붉은 탑을 의미하는 울란(Ulaan) 수베르가를 답사하고 후 독수리계곡이란 뜻을 지닌 율린암(Yolin Am)으로 출발했다. 율린암으로 가기 위해 남부 고비탐사의 마지막 보급도시 달랑자가드를 거쳐야 한다. 이 도시를 향해 가는 중 벌판 위에 흩어져 있는 짐승들의 백골을 발견하고 그곳에 멈춰 이 뼈들을 수집하여 즉석에서 현장설치작업을 했다. 이 뼈들은 아마 작년 겨울을 나지 못하고 동사하거나 굶어죽은 짐승들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일 것이다. 사막의 강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면 독수리들이 날아와 살점을 파먹고 이윽고 늑대, 여우, 까마귀들이 달려들어 나머지 부분을 해체한다. 남은 부분을 온갖 벌레들이 포식하고 나면 뼈만 앙상하게 남는다. 모래바람이 하얗게 씻어낸 뼈는 벌레조차 달려들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다. 그것을 보자니 문득 생명의 순환이란 자연의 섭리가 떠올라 다리부분을 모아 원을 만들었다. 그러자 옆에서 둘러보던 성동훈이 흩어진 뼈를 모아 그 원 위에 다시 삼각형의 도형을 겹쳐놓았다. 우리는 가장 단순한 기하학적 도형으로 구성된 이 즉흥적인 설치에 대해 생명의 순환과 그것을 제어하는 하늘·땅·공기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의미부여를 했다. 물론 주변에 널려있는 동물의 뼈를 수습하여 즉흥적으로 조합한 이 설치는 바람과 시간이 해체할 것이다. 이 뼈들이 사라지기 전 몽골주민이 그것을 발견한다면 그들도 대지 위에 뼈로 그려놓은 원과 삼각형을 보고 자연의 섭리에 대해 생각할지는 미지수이다.

 

율린암, 독수리계곡

 

육로로 이동하지 않고 빨리 고비 내륙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위해 비행장을 갖추고 있는 달랑자가드에 도착하여 다시 급유를 하고 양고기나 야채 등의 생필품을 구입한 후 율린암에 도착했을 때는 땅거미가 어둑어둑 지는 늦은 시간이었다. 계곡 입구의 매표소에 이르러 차에서 내리니 기온이 심상치 않았다. 툭소윤이 볼드로부터 오늘밤부터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니 조심하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애초에 계곡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기로 했으나 갑자기 떨어진 기온으로 망설이고 있는데 근처의 유목민이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기사와 뭔가 대화를 하였다. 소미야 역시 툭소윤처럼 야영하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하며 유목민이 운영하는 게르여관으로 갈 것을 종용했다. 결국 야영계획을 바꿔 그 유목민의 게르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세 동의 게르 중 내가 묵은 곳은 평소 주인내외가 사용하던 본채인 듯 가구도 깔끔하고 작은 서랍장 위에는 불상을 모셔놓은 법단(法壇)과 함께 가족의 기념사진들이 정갈하게 정돈돼 있었다. 그날 저녁 요리당번을 자청한 프란시스가 유럽에서 가져온 양념을 넣은 양고기스튜를 만들어 우리 일행을 감동시켰다.

비록 게르 속이라 하더라도 칼바람은 어쩔 수 없었다. 밤새 기온은 급강하했고 더욱이 새벽에 세찬 바람소리와 추위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유목민의 냄새가 밴 이불 속에서 나오기 싫었지만 이미 잠에서 깨어났으므로 옷을 두껍게 껴입고 밖으로 나서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밤새 눈이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언덕 위에 양들이 추위를 피해 서로 등을 맞대고 모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추위에 도망가지 않도록 유목민 주인이 발을 묶어놓았기 때문에 밤새 눈을 맞으며 꼼짝없이 서있어야 했던 말 두 마리의 가련한 모습도 보였다.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과 내린 눈을 보자니 어젯밤에 계곡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지 않은 것이 무척 다행스러웠다. 만약 무리하게 야영을 했더라면 밤새 추위에 떨다 철수하는 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른 일행들은 비교적 밤새 몰아닥친 추위를 잘 견뎠지만 사진작가 광모만 뚝 떨어진 날씨에 굴복하고 말았다. 말수가 적고 얌전한 성격인 그는 감기가 들어 건강상태가 아주 안 좋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이 걱정할까봐 며칠 동안 혼자 기진맥진한 몸으로 ‘겁을 상실한 자’들을 따라다니는 불행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어쨌든 원주민이 비축해놓은 물로 고양이세수를 하고 계곡에 도착하자 일곱 개의 말안장이 눈 덮인 초원 위에 놓여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성동훈이 즉흥적인 퍼포먼스를 제안했다. 여덟 명의 일행 중 촬영을 할 광모만 제외하고 모두 말안장 앞에 서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며 대지의 영령을 부르는 소리를 내자는 것이었다. 샤머니즘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몽골에서 이 퍼포먼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모두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으로 둘러싸인 사방을 향해 천천히 돌며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소리를 내질렀다. 우리들의 이상한 짓거리를 보고 있던 두 명의 몽골 기사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될 해괴한 행위였지만 모두 진지하게 대지와 대기에 바치는 경외의 소리를 외쳤다. 이 퍼포먼스를 마치자마자 멀리서 원주민들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그 안장은 계곡을 찾은 관광객들이 승마를 즐기도록 그 원주민들이 미리 갖다놓은 것이었다. 이상한 퍼포먼스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계곡 깊숙이 들어가자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보이는 하늘 위로 독수리 떼들이 유유히 날고 있었다. 몽골사람들이 ‘황금독수리’라고 부르며 신성하게 여기는 독수리의 비행을 보며 더 깊이 들어가자 좁은 협곡이 굽이치며 계속 이어졌다. 급격하게 떨어진 기온과 칼바람으로 한기를 느낀 우리는 계곡 깊숙한 곳에서 각자 현장작업을 했는데 나는 계곡 여기저기 널브러진 돌무더기에 착안하여 작은 규모의 오보를 쌓았다. 한나절을 열심히 돌을 나르고 차곡차곡 쌓아야하는 노동집약적인 행위는 결국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만든다. 결과보다 과정에 몰입하면서 여행을 떠나는 몽골인들이 작은 돌을 주어 돌탑을 쌓는 경건함마저 느낄 수 있었지만 결국 그럴듯한 규모와 형태로 완성하지 못한 채 서둘러 계곡을 내려왔다. 게르로 돌아와 짐을 꾸리며 떠날 차비를 하려니 주인부부가 어제 밤에 나눠먹은 프란시스가 만든 양고기스튜에 대한 보답으로 양의 내장을 끓인 탕을 가져왔다. 이미 우리 일행은 라면으로 요기를 한 후였으므로 그 고마운 음식을 다 비우지 못한 채 두 번째 현장작업 장소인 바양작(Bayan Zag)으로 출발했다.

 

불타는 절벽 바양작에서 연출한 의사고고학적 설치

바양작은 한때 호수로 둘러싸여 사막 속에 울창한 나무숲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공룡화석 출토지로 유명한 사막이다. 붉은 사암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꼭 불이 활활 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1922년 이 지역에서 공룡의 두개골, 뼈, 알 등의 화석을 발견한 미국 고고유전학자 로이 앤드류스(Roy Chapman Andrews)가 ‘불타는 벼랑’이라고 불렀던 절벽 아래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큰 호수가 있었으나 현재는 바짝 말라 물이 흘렀던 흔적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절벽 뒤로는 고비사막에서도 흔치 않은 사막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는 숲이 펼쳐지고 있다. 율린암에서 이미 혹독한 추위를 겪었으므로 바양작에서도 야영대신 ‘럭셔리 투어리스트 캠프 호텔’이란 이름만 들으면 사막 속의 호사스런 호텔을 떠올릴 수 있지만 실제로 여러 채의 게르로 구성된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다.

도착한 날 저녁 우리는 사막작업에 대한 작은 세미나를 가졌다. 각자 어떤 작업을 할 것인지에 대해 발표했다. 바양작에 도착하여 현장작업 장소를 물색하던 중 사막 여지저기에 흩어져있던 문명의 찌꺼기인 깡통, 플라스틱 물병, 비닐봉지 등의 쓰레기들을 봤던 나는 황사의 진원지 중의 하나이기도 한 고비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들을 모아 긴 띠 모양의 화살표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물론 그 화살표가 향하는 곳은 한국이다. 황사는 비단 모래바람뿐만 아니라 중국대륙을 통과하며 온갖 산업오염물들을 함께 실어온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다. 그러자 성동훈이 이 지역이 공룡화석 출토지이므로 발굴을 주제로 한 설치작업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이명복이 두 아이디어를 통합하는 기막힌 안을 제시했다. 즉 쓰레기를 수집하여 파묻고 그것을 발굴하는 과정을 전부 기록하자는 것이었다. 뜻을 같이 한 세 명은 즉석에서 한 팀을 구성할 수 있었다. 프란시스는 GPS를 이용해 대지 위에 큰 원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대지예술을 하겠다고 했다. 이미 차간수베르가에서부터 낙타와 말의 뼈를 수집하고 그 위에 드로잉을 하기로 계획을 세운 다발킴은 자신의 계획대로 작업하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 우리 일행은 차를 몰아 붉은 절벽으로 가서 작업하기 좋은 장소를 물색했다. 절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풍화에 의해 깎여나간 바위가 마치 거대한 비석처럼 서있는 것이 눈에 들어와 즉석에서 그곳을 작업장소로 정하여 언덕을 내려갔다. 먼저 주변을 돌아다니며 공룡화석 출토지를 찾아온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온갖 쓰레기들부터 수집했다. 그 쓰레기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역시 플라스틱 물병과 코카콜라 깡통이었다. 더러 한국산 비닐과자봉지도 눈에 띠었다. 상당한 쓰레기를 수집한 우리는 고고학자들이 유적발굴지에서 하는 것처럼 노끈을 이용해 일정한 규격으로 구획한 장방형의 땅을 파들어갔다. 실제 고고학적 발굴은 지면 깊숙이 땅을 파고 그 속에 파묻혀 있는 지나간 시간의 증거들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리는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많은 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단 세 명이 하는 의사고고학적으로 연출된 발굴작업을 위해 지표면 깊숙이 땅을 파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지표면은 부드러운 모래층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단단한 암반층이 나왔으므로 쓰레기를 묻을 수 있는 정도의 깊이만 파고 그 속에 쓰레기를 파묻고 뻔뻔하게도 ‘21세기가 남긴 잔여물’이란 표지판을 세웠다. 그 맞은편에는 다발킴이 수집한 산양의 두개골과 정체불명의 동물뼈를 함께 파묻었다. 우리가 세운 가설, 즉 바양작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21세기의 온갖 쓰레기들이 모래바람에 묻혀 있다 22세기 어느날 인류의 후손들에 의해 발굴된다는 시나리오는 어떻게 보면 순진하고 뻔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정성을 다해 우리가 파묻은 쓰레기를 다시 발굴하는 과정을 연출했고 그것을 비디오와 사진으로 기록했다. 우리가 수집하여 파묻고 다시 끄집어낸 쓰레기들 중 일부는 귀국하며 가져왔다. 그 쓰레기들은 다발킴의 동물뼈와 함께 몽골을 떠날 때 공항에서의 검색과정에서 문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무사히 한국으로 수송돼 전시되었다.

다음날 프란시스는 작업을 위해 노련한 기사를 데리고 사막으로 갔다. 성동훈과 이명복도 작업을 위해 절벽으로 가고, 나와 툭소윤은 게르에 남아 점심식사를 준비했다. 오후에 바양작을 출발해 모래언덕으로 잘 알려져 있고, 마지막 작업장소인 홍고린 엘스(Khogoryn Els)로 향했다.

 

홍고린엘스의 정상을 정복하다.

 

넓이가 약 2킬로미터에서 12킬로미터에 이르며 길이는 약 150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띠를 형성하며 모래언덕이 마치 성벽처럼 펼쳐진 홍고린 엘스는 조금만 더 내려가면 중국의 국경과 마주치는 몽골의 남서단에 위치하고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황무지와 바위언덕, 유목민들이 방목하는 양떼나 낙타들을 만날 수 있는 메마른 초원을 지나치며 도로표지도 이정표도 없는 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이번에도 경험이 풍부한 기사가 사막 한 가운데서 길을 잃어 잠시 평원 위에서 큰 원을 그리며 길을 찾아 헤매는 작은 사건이 벌어졌으나 근처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원주민에게 길을 물어 모래언덕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에야 길게 펼쳐진 모래언덕 아래 물이 흐르는 장소에 도착했다. 야영하기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 곧바로 텐트를 치는 일에 이미 익숙해진 우리 일행은 재빨리 캠프를 설치하고 곧장 재미있는 장난에 들어갔다. 내가 성동훈이 가져온 러시아제 망원경으로 모래언덕을 바라보는 시늉을 하자 곧장 이명복, 박세진이 옆에 와 앉았고 성동훈이 이 즉흥적인 연기에 합세하여 마치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길을 떠난 사람들이 물이 흐르는 땅을 발견한 듯 연출한 장면을 촬영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프란시스가 달랑자가드에서 구입하였으나 이동하는 동안 모두 나눠먹었기 때문에 내용물이 없는 빈 과자상자를 들고 나와 작은 모래둔덕 뒤에 숨었다 나오며 “과자가 있는 곳이라면 프란시스는 어디든 갑니다”란 깜짝 연기를 해 모두 환호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생산한 이 과자는 한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 수출돼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었으므로 프란시스도 특별히 이 과자를 즐겼다.

캠프를 치면서 이미 텐트를 설치하는 팀과 짐승의 배설물이나 주변에 흩어져 있던 마른 나뭇가지 등 연료를 확보하는 팀으로 나눠 각자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으므로 캠프 앞에 마련한 작은 화덕 주변에는 이틀 정도는 땔 수 있는 나뭇가지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모닥불 주변에 모여앉아 몽골산 보드카를 나눠 마시며 사막프로젝트의 의미와 다음날 모래언덕에서 할 작업에 대해 대화하였다. 또 프란시스가 부르는 팝송을 듣다보니 사막의 밤이 깊어갔다. 각자 텐트로 흩어져 잠자리에 들었는데 모두 아침 일찍 일어났다. 아침의 날씨는 싸늘했지만 상쾌했다. 아침식사를 하자마자 각자 작업도구를 챙겨 모래언덕으로 향했다. 물이 얕게 느릿느릿 흐르는 내를 건너 듬성듬성 아무렇게나 자란 관목을 마치 정리안한 쑥대머리처럼 이고 있는 크고 작은 둔덕을 지나자 결이 고운 모래밭이 펼쳐졌다. 오랜 시간에 걸친 풍화와 침식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모래밭의 물결무늬는 바람이 그려놓은 추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 모래밭 앞을 거대한 모래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경계에 생명력이 질긴 잡초들이 모래바람에 일렁이며 바닥에 작은 원들을 그리고 있었다. 성채처럼 가로막고 있는 모래언덕을 보자 특별한 이유도 없이 꼭대기로 올라가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발이 푹푹 빠지는 고운 모래들이 쌓인 언덕으로 올라가자 일행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문득 뒤돌아보니 오리 일행의 텐트가 아주 작게 눈에 들어왔다. 발밑으로는 내가 올라온 발자국뿐이었다. 뒤따라 올라오던 이명복조차 등반을 포기하고 뒤돌아서자 덜컥 겁이 났다. 중간지점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시 휴식을 취할 때 물병을 들고 오지 않은 사실을 깨닫고 그냥 내려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대로 된 등산의 경험도 없고 게다가 모래산을 오르긴 처음이었기 때문에 가파른 언덕을 지그재그로 올라가다 발을 헛디딜 경우 움푹 꺼진 곳으로 미끄러질 경우 모래무덤에 묻힐지도 모른다는 다소 과잉된 공포가 몰려왔으나 바로 머리 위로 펼쳐지는 능선을 보고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야릇한 두려움과 쾌감을 느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니 어느듯 정상에 도달했다. 이 모래언덕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은 해발 800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뾰쪽하게 솟아 한 사람 정도만 간신히 서있을 수 있는 정상에 서서 주변을 훑어보니 더 높은 곳은 없었다. 아마 주변에서 제일 높은 모래산에 도달한듯했다. 발밑으로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멀리 청보라색의 색면처럼 아득하게 보이는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좋았지만 캠프에서는 모래성벽 때문에 볼 수 없었던 반대편의 모래 구릉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바람이 거세 몸을 가누기 약간 불편했으나 정상을 정복했다는 성취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아침 일찍 누군가 벌써 이 산을 거쳐 능선을 따라 다른 모래언덕으로 이동한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멀리 두 명이 다른 능선에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가지고 올라와 남겨둔 것인지 아니면 오래 전에 이곳을 다녀간 사람의 흔적인지 정상에 낙타의 하얀 두개골이 놓여 있었다. 나는 주저없이 그 백골 주변의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내 영문이름의 이니셜을 새기고 능청스럽게 그것을 내 작품인양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러고 있으려니 내가 올라왔던 반대편에서 툭소윤이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박세진도 무거운 비디오카메라를 메고 올라왔다. 박세진이 정상에 도달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툭소윤이 모래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가면 그 마찰음이 마치 악기를 연주하거나 모래들이 노래하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가르쳐주었다. 그녀의 말에 따라 가파른 모래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오니 모래들이 사각이며 내는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모래언덕 위에 떠있는 배

 

홍고린 엘스에서 성동훈은 사막나무의 줄기를 수집하여 사각형의 프레임을 제작했다. 그는 한동안 이 프레임을 모래언덕에 세워두었다. 그것은 모래사막에서 다른 장소, 이를테면 반대편의 초원이나 혹은 모래언덕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브제를 만드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그는 이 프레임을 들고 와 이번 프로젝트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을 그 앞에 세우고 촬영을 했다. 그 프레임은 바로 우리들의 초상들 담는 액자였던 것이다. 이명복은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아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배를 제작했다. 그 옆에서 나는 아마 이번 고비작업 중에서 가장 멍청한 것일 <은거지>를 만들었다. 작은 나뭇가지로 내 팔을 뻗을 수 있을 정도의 원을 그리고 그 선을 따라 잔가지들을 쌓아올린 이 설치는 말 그대로 ‘시간 죽이기’이자 오로지 손에 의존한 원시적인 노동의 축적물이었다. 비교적 긴 나무를 땅에 박아 기둥을 만들고 그 사이로 가지를 쌓아올리기 위해 엄청난 양의 나뭇가지가 필요했다. 어린 시절 개발이 안 된 나대지에 혼자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땅굴을 파고 놀았던 추억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 판타지에 이끌려 열심히 나뭇가지를 쌓아올렸으나 정작 내가 원한 것은 은둔자의 수행처가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이 지역을 찾은 유목민들에게 땔감을 제공하자는 것이었다. 이 노동집약적인 작업을 위해 하루종일 주변에 흩어진 나뭇가지를 싹쓸이해버리자 노끈으로 정성스럽게 배의 형상을 만들어가던 이명복으로부터 내가 재료를 모두 독점해 작업하기 어렵다는 볼멘소리가 들려올 지경이었다. 이명복과 나의 작업은 이튿날까지 계속되었다. 내가 쌓고 있던 움집과 같은 원시 주거공간은 도저히 이틀만에 완성할 수 없는 무모한 시도였으나 이명복의 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정오쯤 배의 뼈대를 갖춘 그의 배는 모래둔덕으로 옮겼다. 비록 규모도 작고 사막의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를 엮은 것이기 때문에 배의 기능과 상관없는 것이었으나 그것은 모래 위에 나뭇가지로 그려놓은 드로잉처럼 보였다. 그것은 한때 바다였으나 융기하여 땅이 되고, 오랜 세월에 의해 사막으로 변해버린 이 모래언덕의 먼 과거가 갑자기 불쑥 노출된 듯 언덕 위에 비스듬하게 누워있었다. 모래언덕 위에 떠있는 배, 유목적 환경에 낯선 이 물체는 바다가 대지로 변하면서 망각의 저편으로 실려간 시간의 흔적을 되살림은 물론 항해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했다. 홍고린 엘스에서 울란바타르로 귀환하는 길에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서 이명복은 천막을 벗겨낸 게르의 나무뼈대에 자신의 모든 소지품을 주렁주렁 매다는 설치작업을 했다. 사실 열흘간의 작업을 위해 그가 소지한 물건의 종류나 양은 제한적이지만 그것을 다 매달아놓자 피부가 벗겨진 게르의 속내, 즉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의 삶을 전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양말, 속옷, 손전등, 심지어 일회용 라이터까지 매달아놓은 그의 설치는 아주 짧은 시간만 전시되었으나 현장에 두고 온 배만큼이나 이번 사막프로젝트의 성격에 부합하는 작업으로 기억된다.

또한 다발킴의 <10명에게 바치는 경의>는 고비사막프로젝트의 의미를 잘 살린 설치작업으로 평가할만하다. 그녀는 우리가 매일 식기로 사용하던 열 개의 플라스틱 그릇에 모래를 담고 그 속에 숟가락과 마른 나뭇가지, 동물의 뼈, 건조된 동물의 배설물을 올려놓았다. 이 그릇들을 일렬로 세운 것은 마치 제사에서 조상의 신위께 바치는 젯밥 같기도 하고 주디 시카고의 <만찬>에는 못 미치지만 우리가 매 끼니마다 먹었던 소박한 식탁 같기도 했다. 그것은 열흘간 함께 숙식하며 사막을 유랑한 열 사람의 초상임에 분명하다.

 

다시 사막을 기다리며

 

열흘 남짓은 고비를 체험하기에 턱없이 짧은 시간임에 분명하다. 비록 야영을 할 때는 불편했으나 벌써 추억이 될 만큼 사막작업은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 프로젝트팀이 울란바타르에 도착했을 이미 한국과 몽골작가들로 구성된 다른 팀이 우리와 성격은 다소 다르지만 고비에서의 작업을 위해 그곳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막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나 환상에 의해서든, 오지의 낯선 풍경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든, 아니면 날로 악화되는 지구의 환경문제를 생각하며 문명인들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한 목적에 의해서든 앞으로도 많은 작가들이 고비사막을 찾아갈 것이다.

고비에서 치른 국제사막예술프로젝트의 결과는 아직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를 통해 인간이란 자연 앞에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우리에게 익숙한 도구나 재료가 없는 상태에서 과연 무슨 작업을 할 수 있는지 깨닫는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소중한 경험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막예술프로젝트는 네바다와 고비를 거쳐 앞으로도 삼 년마다 인도의 자이푸르, 아프리카의 사하라, 볼리비아의 소금사막 등 대륙을 이동하며 계속 이어질 것이므로 여행자가 아닌 다른 입장과 위치에서 이 프로젝트에 계속 참가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